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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로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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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닥나무와 폐지로 종이를 만들고, 그 종이를 다시 찢고 쌓아가며 그것을 조형으로 확장하여 시간과 기억의 구조를 가시화하는 작업을 한다. 나에게 종이는 단순한 지지체가 아니다. 사람의 흔적과 이야기를 품고 시간을 축적해 온 물질 그 자체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종이 위에 사건을 기록하고 지식을 전하며 기억을 쌓아왔다. 그렇게 종이는 인간의 삶이 축적되는 장소가 되었고, 문화와 역사를 지탱해 온 매체가 되었다.

종이를 뜨는 반복적인 행위는 나에게 흘러가는 순간을 잠시 붙잡기 위한 신체적 실천이다. 동시에 손 틈 사이로 흘러가 버린 풍경과 기억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도시 속에서 장소와 사물, 기억은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사라진다.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붙잡지 못한 채 또 다른 풍경으로 옮겨간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코로나 이후 가까운 곳에서 반복적으로 목격한 철거와 재개발의 풍경을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익숙했던 거리의 모습이 빠르게 다른 풍경으로 대체되고, 과거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만 겨우 남게 되었을 때, 나는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이 오래된 기억 위에 겹겹이 쌓이며 갱신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러한 인식은 ‘기억을 어떻게 물질로 다룰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헌책과 폐지를 다시 종이로 만드는 ‘다시뜨기(漉き返し)’ 기법으로 나를 이끌었다. 종이에 남아 있던 문자와 이미지를 잘게 찢어 물로 되돌린 뒤, 새로운 두께를 가진 종이로 다시 떠내는 행위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를 새로운 시간의 층으로 현재 위에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이다.

물속에서 풀어진 섬유가 서로 얽히고, 건조를 거쳐 하나의 면이 된 뒤, 그 위에 다시 층이 더해지는 제작 과정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수직으로 적층되는 구조’로 상상하게 했다.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수백, 수천 겹으로 쌓아 올린 종이 기둥 《Sequence》는 기억의 단편들이 지층처럼 포개져 하나의 역사를 이루는 시간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제작에 들인 시간은 작품의 두께라는 물질로 환원되고, 보이지 않던 시간은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존재로 드러난다. 이는 디지털화가 가속화되고 기억마저 비물질화되어 가는 오늘날, 속도와 효율에 의해 균질화된 현재를 아날로그적 제작 행위를 통해 다시 바라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종이를 통해 시간의 적층을 탐구하면서 나는 점차 시간 자체의 ‘형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순간의 시간은 점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은 선으로, 순환하는 시간은 원으로, 서로 다른 리듬과 밀도로 경험되는 시간은 보다 다층적인 입체로 치환된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최근에는 종이에 머무르지 않고 스테인리스 스틸과 은박 등 다양한 재료를 작업에 도입하며 시간의 여러 양상을 탐구하고 있다.

스테인리스 스틸의 표면은 종이처럼 시간을 축적하지 않는다. 대신 그 순간의 환경을 즉각적으로 반사한다. 나는 그 찰나의 반짝임 속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의 속성을 발견한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한 모빌은 공기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회전하며 한 번도 같은 형상을 유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 움직임은 중심축을 따라 원을 그리는 순환이기도 하다. 변화와 순환, 차이와 반복이라는 서로 상반된 시간성이 하나의 운동 안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한편 종이 위에 입힌 은박은 또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드러낸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달리 은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서서히 산화되고, 주변 환경을 받아들이며 변화한다. 따라서 작품은 전시의 시작과 끝에서 서로 다른 표정을 갖게 된다. 영속성을 지닌 재료와 변화하는 재료가 같은 공간에 놓일 때,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은 하나의 장 안에서 겹쳐진다.

과거의 작업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건과 기억을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했다면, 최근의 작업은 시간 그 자체의 구조와 성질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수직으로 축적되는 시간과 순환하는 시간이 교차하고, 서로 다른 물질과 운동, 서로 다른 속도가 만날 때 시간은 더 이상 단선적인 개념이 아니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구조로 드러난다.

 

나에게 작품은 서로 다른 시간성이 만나고 교차하는 하나의 장소이다. 종이의 적층, 금속의 반사, 은의 산화라는 서로 다른 물질을 통해 나는 시간을 사유한다. 그 앞에 선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단 한 번뿐인 순간과, 끝없이 축적되어 가는 시간의 흐름을 동시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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