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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림의 작품에 대하여

카시와기 코우 (미술가, 타마미술대학 교수) 

이혜림은 현재 타마미술대학 대학원 박사후기과정 학생으로, 나는 그녀의 실기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이혜림과의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본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고 상담하러 왔을 때였다. 모국, 한국의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그 후 사회경험을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갈 준비를 하고 있던 무렵이다. 그때 보여준 스케치 중 하나에 천 너머로 보이는 공사장 풍경이 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작품의 자료를 보여줬는데 공사장과 천 스케치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지금까지 염색 기법에 의한 작품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학생이 대학원 텍스타일디자인 연구 영역에서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긴 했지만 우선 연구생이 되어 대학원 수험을 준비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연구생으로 본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 초기에는 전통적인 염색 기법과 실크스크린을 통한 프린트지 제작에 전념 했으나 후기에 이르러 종이 뜨기 수업에 참여하면서 독자적인 재료와 방법으로 『シナブロ(시나브로)』 시리즈 작품을 제작해 1년간의 성과로 삼았다. 이것이 이혜림에게 최초의 종이뜨기에 의한 작품이다.

 

대학원 석사과정에서는 '종이 뜨기'와 '시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관심사에 호기심의 안테나를 넓혀 작품 제작과 논문 집필에 힘 썼으며, 공모전에 응모하거나 개인전을 개최하거나 적극적인 자세로 제작·연구를 진행하였다.

아래 지난 3년간 이혜림이 제작한 작품에 대해 본인의 말을 바탕으로 말하고자 한다.

종이 뜨기 기법과의 만남인 『시나브로』에서는 농도를 옅게 한 지료(紙料)를 틀 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시간을 들여 재료를 겹쳐 행위의 흔적을 남겼다. 모르는 사이에 점점 완성되는 『시나브로』에서는 제작 과정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눌러 담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가시화를 시도했다.

『シナブロ』를 발전시킨 것이 석사 과정의 1년차 후반에 임한 『カレンダープロジェクト(Calendar Project)』였다.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달력의 표형식의 틀을 작품의 윤곽으로 하고, 자신과 주위의 존재를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파악한 결과를 작품화 한 것이라고 본인은 말하고 있다. 매일 그날만큼 제작을 진행해야 하는 이 프로젝트는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고 대학 설비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수 개월치 달력을 완성한 뒤 중단될 수밖에 없어 미완의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큰 크기의 종이를 뜨지 못하게 된 이혜림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작은 크기의 종이를 많이 만들기로 작업 방식을 바꿨다.

 

이때부터 이혜림은 닥나무(コウゾ)나 안피(雁皮) 등 와시(和紙)의 대표적인 재료에 다 읽은 헌 잡지 등을 섞어 다시 떠내는 것, 즉 폐지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역할이나 그려진 글씨가 보여주는 내용을 한번 부수고 다시 떠냄으로써 지금 이 한순간에 새로운 종이로 되살리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종이(時間の経過を表す紙)'나 '시간이 깃든 종이(時間が宿る紙)'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도 딱 이 시기였던 것 같다.

크기는 같지만 여러 종류의 지료에 따른 많은 종이를 떠서 굵기나 색깔이 다른 실과 바늘로 꿰매어 한 장의 큰 종이로 변화시키는 작품 『つづく(Continue)』을 제작하게 된다.'계속'은 오로지 종이를 뜨는 몸짓이나 담담하게 꿰매는 행위와 지나가는 시간을 은유적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3년간의 집대성 작품이 되었다.

코로나19 사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대면 수업이 재개되고 대학 실습실도 학생들에게 개방된 2020년 9월 이후 자숙 기간 중 만난 '숙지(宿紙)'나 '환혼지(還魂紙)'라는 말에서 촉발돼 골동품 시장에서 구한 연대기 책과 고문서 종이를 다시 떠 만든  『moment』 시리즈를 제작한다.「moment」는 「つづく」와 함께 석사 수료 제작 작품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 되었다.
 
화가는 종이나 천을 회화의 지지체로 여겨 평면으로 간주하고 그 표면에 색이나 모양을 그려 나타낸다. 집필가 또한 종이 표면에 글자를 적어 사건과 사고를 미래에 전달해 왔다. 그러나 직물작가는 천의 조직구조를 바라보기 때문에 평면으로 간주하지 않고 극히 얇은 입체로 여겨 직물을 제작하고, 염색가는 천의 표층에 착색하지 않고 섬유 깊숙이 색을 침투시켜 염색물을 제작한다. 마찬가지로 종이를 뜨는 사람도 표면 뿐만 아니라 종이 안쪽에서 결합되는 식물 섬유의 행선지를 바라보며 종이를 뜨기 때문에 역시 종이를 얇은 입체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에서 출발한 이혜림은 4년 전 텍스타일과 종이 뜨기 기법과 만나 작업을 이어가는 가운데 위와 같은 인식 차이에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간'을 주제로 하는 가운데, 서서히 평면에서 입체로 종이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 온 것 같다. 앞으로는 더 많은 가능성을 담은 '시간이 깃든 종이'를 제작해 나갈 것이다.

조형작가로서는 아직 성장과정에 있지만 이번에 오가와마치( - 사이타마현에 위치한 마을로,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호소카와시의 산지다. 이혜림은 2021년 오가와마치에서 아티스트 인 레지던시에 참여하였고, 본 원고는 레지던시 참여 후 성과 발표 전시 기념으로 제작한 카탈로그에 실린 글이다 - 옮긴이의 말)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전통기술을 배우고 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이혜림에게 분명 큰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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